LOVE FICTION 04
그 날 이후로 성진은 레퍼토리를 바꾼 듯 했다. 그러니까 도운이 무슨 말만 하면 ‘예뻐서.’라는 대답을 내어 주던 것에서 ‘그래서 대답은 언제 해?’로. 그 놈의 예쁘다는 소리도 잔뜩 낯이 간지럽고 기분이 요상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번 이슈는 조금 더 도운을 곤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뿐일까. 성진은 아침에 교문에서 도운-과 희영-을 기다리기도 했고, 점심시간에는 당연스레 도운-과 희영-의 옆에 앉았고, 집에 갈 때조차 교문까지 도운-과 희영-을 데려다 주 듯 따라 나섰다. 그런 성진의 변화에 제일 신이 난 것은 희영이었다.
“왐마야.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는 기가?”
그 당사자들을 양 쪽에 끼고 가운데 선 희영이 잔뜩 신이 나서는 물었다. 도운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렸고, 성진은..
“뭘?”
제법 눈치가 없게 굴었다. 아니, 진짜 눈치가 없나? 제가 이렇게나 불편한 얼굴을 하는데도 굳이 매번 따라 붙은 성진을 향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놓는 도운이었다.
“고백은? 했나?”
돌직구도 이런 돌직구가 없지. 애초에 희영은 애둘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교문을 향해 걸어가는 하교 길의 교정은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희영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성진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도운이 더욱 껄끄러운 것은.
“응.”
또 저렇게 순순히 대답을 내어주는 성진이었다. 저도 모르게 한 숨을 내 쉬며 제 이마를 짚은 도운이 걸음을 재촉하자 등 뒤에서 희영의 맑은 웃음소리가 따라 나섰다.
“미친놈이 아니라 게이였네.”
도운은 눈을 감았다 뜨면 제 방, 제 침대인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
“그러니까 어떻게 고백을 한 건데?”
그러니까 내 하나 뿐인 친구는 왜 이렇게 호기심이 많을까. 도운은 제 집 식탁에 앉아 태연히 빵을 찢으며 저를 향해 생글, 웃음을 내미는 희영을 힐끗 눈으로 살피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니 오늘 우리 집에 과제하러 온 거다.”
“안다. 과제도 할 거다. 이것만 먹고.”
“그라믄 빨리 먹고 해라. 느그 아버지, 니가 우리 집 오는 거 싫어하시잖아.”
“그치그치. 그러니까 빨리 얘기해 봐 봐.”
“뭘?”
“박성진이 니한테 고백한 이야기.”
테이블 가까이로 한껏 몸을 당겨 앉은 희영의 물음에 도운의 입술이 여지없이 다물렸다. 꾸욱, 힘을 주어 당긴 입술 끝이 하얗게 변했다 돌아 왔다. 도운은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노트 위로 손을 움직이기에 분주했다. 희영은 눈을 반짝이며 도운을 졸랐지만 침묵을 지키는 그의 모습에 이내 뾰루퉁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째꼴하네, 진짜.”
“뭐가 째꼴하노.”
“내가 니 연애사 좀 알면 어때서 그걸 말 안 해주노.”
“연애사가 아니니까 그렇지.”
퉁명스러운 도운의 대답에도 희영은 연신 궁시렁, 궁시렁 입을 삐죽였다. 평소에는 이쯤하면 포기하고 두 손을 들던 희영이었는데 이번에는 유독 그것이 끈질겨 도운은 없던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내랑 금마가 가당키나 하나?”
결국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놓고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도운의 말에 희영의 눈이 둥그렇게 뜨이며 가지런한 속눈썹을 껌뻑였다.
“안 될 건 뭔데?”
“솔직히 금마가 내를 왜 만나겠노?”
“예뻐서.”
마치 몇 주 전, 내내 성진의 입술에 매달렸던 그 말이 희영의 입에서 나오자 도운은 짜증이 차올라 그녀를 한껏 쏘아보았다. 물론 강희영은 눈 하나 깜짝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지만.
“구김 없는 부잣집 도련님 장난질에 휘둘려 줄 여유같은 거 내는 없다.”
“박성진이 그런 걸로 장난 칠만큼 위트 넘치는 아는 아닌데.”
고개를 내 젓는 도운의 말에 냉큼 대답을 내어 준 희영의 말이 그리 곱게 들리지 않았던 도운이 입술을 삐죽였다.
“니는 대체 누구 친구고?”
“내야 윤도운이 친구지. 그러니까 이라지.”
“그러니까 이라지?”
“나는 내 친구의 첫 연애가 그렇게 끝내주는 조건의 남자인 게 너어어무 마음에 든다. 돈 많아, 몸 좋아, 도내 소문날만큼 얼굴 잘생겼지. 니 예뻐 죽지. 뭐가 문제고?”
그 모든 게 문제라는 말은 차마 그녀에게 할 수 없어 도운은 대신 입을 다문 채, 내던졌던 펜을 다시 쥐었다.
*
윤도운의 첫 연애 상대는 도운보다 8살이 많은 남자였다. 해가 뜨겁던 여름 날, 도로에 붉은 빛이 도는 블록을 까느라 온 몸이 후끈거리던 때에 같은 현장에서 일하던 남자였는데, 지금보다 더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도운에게 늘 살갑게 먼저 다가서던 남자였다.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저도 모르게 기가 죽어 있던 도운에게 말을 건네고, 다정스레 챙기던 그는 어느 순간엔가 도운과 꽤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도운 역시 제게 호의적인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던 어느 날, 남자는 도운에게 입 맞췄고 도운은 그저 남자의 손을 잡았다. 저와 연애를 하지 않겠냐는 남자의 말에 도운은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제가 거절하면 남자는 저를 떠날지도 몰라서. 이제 누군가가 저를 두고 가버리는 것은 지긋지긋해서. 그는 도운에게 언제나처럼 다정스러웠고 도운은 점차 그의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해 져 갔다.
남자는 늘 무언가를 원했고, 도운은 단 한 번도 거절을 할 줄 몰랐다. 몸을 원하면 몸을 내어줬고, 술에 잔뜩 취해 제 집 문을 두드리는 남자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자신은 소파에 구겨져 잠을 드는 날도 있었다. 급히 돈이 필요하다는 남자를 위해 그 날 받은 주급의 절반을 떼어주면서도 도운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도운은 그것이 남자가 제 옆에 있어주는 조건이라면 얼마 던 들어 줄 수 있다 생각했다.
그 비이상적인 연애가 마침표를 찍은 것은 도운이 감기에 걸려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하루 종일 연락 한 번 없던 남자는 늦은 밤에야 도운의 집 문을 두드렸다. 고열에 달뜬 몸을 휘청이며 겨우 문을 열자 눈앞의 남자는 다른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였다. 얼이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진 도운에게 남자는 웃었다.
‘벌써 버스가 끊겼지 뭐고. 오늘 좀 자고 가도 되제?’
언제나처럼 다정한 그 미소에 도운은 턱을 당겨 물고 문고리를 말아 쥐었다.
‘안 된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고열의 탓인지, 그 남자의 뻔뻔한 미소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도운이 무거운 소릴 내며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야! 윤도운! 니 주제에 지금 내 말을 거절해? 야! 뭐고. 문 안 열어? 하. 정신 차리라. 니가 감히 내 말을 안 듣는다 이거야? 혼자 빌빌거리고 다니는 거 불쌍해서 몇 번 놀아줬더니 니가 뭐라도 된 줄 아나? 씨발, 고분고분한 거 하나 봐 줄만 하다 싶었는데 이제 기어오르네? 야. 문 열어. 빨리 안 열어?’
닫힌 문 너머로 남자의 짜증 섞인 고성이 도운의 등을 할퀴었다. 마침 도운의 상태를 살피러 오던 희영이 경찰을 불러 남자는 끌려 나갔지만 도운은 한참이나 그 문 너머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자는 도운에게 받아간 돈으로 여자를 사거나, 술을 마셨고 입도 가벼워 도운와의 일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고 했다.
‘비쩍 말라 감흥도 없는 거지새끼 조금만 잘 해주면 몸도 주고 지갑도 주더라. 그런데 이 배은망덕한 새끼가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던지 여자 쫌 데리고 갔다고 경찰을 부르는기라.’
따위의 싸구려 이야기들을 어찌나 떠들고 다녔던지 도운은 나름 페이가 세던 현장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 얘기가 성진과의 일과 무슨 상관이냐 묻는다면 그 때 이후로 도운은 도무지 신뢰라는 것을 갖기 힘들어졌다는 것에 있었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낸 희영을 제외 하고는 저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의심부터 하고 보게 되었다. 게다가 그런 양아치 같은 사람조차 자신을 그렇게 쉽게 보고 가지고 놀았는데 도대체 성진이 왜 저를 진심으로 대한다는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문제였다. 모든 면에서 조건이 기우는 성진이 좋아한다던 그 말 모두가 도운에게는 부잣집 도련님의 질 나쁜 장난질로 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쓰기 편한 애, 정도가 그가 원하는 도운의 포지션이 아닐까. 그저 아무것도 아닌 애가 이렇게나 자기를 무시하니까 오기가 나서 그런 거겠지. 도운은 카페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길 건너에 선 성진을 보며 다시 한 번 제 확신에 찬 생각을 곱씹었다.
*
그리고 도운은 그 날 희영에게 ‘모든 게 다 문제야.’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성진의 장난이 심해지고 있었다. 아침이면 도운-과 희영-을 마중이라도 오듯 기다리는 그 검은 세단 (도운은 희영의 집에서 그녀에게 붙여 준 중형차조차 부담스러워 해 희영까지 도보 등교를 하던 마당에!)에, 그 차 안에 준비된 종류별의 샌드위치와 이름도 처음 듣는 원두로 만들었다는 커피와, 하루에 최소 한 번은 도운 앞에 내밀어지는 상자가 문제였다.
“..이건 또 뭐고?”
오늘도 어김없이 도운의 어깨 위로 굴리 듯 던져 주는 상자는 어제의 것보다 그 크기가 작았다. 청량한 민트색의 상자는 하얀 새틴 리본으로 포장이 되어 있었는데, 도운의 물음에 곁눈질을 하던 희영이 두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을 정도니 보나마나 이것도 꽤 나 이름이 난 브랜드의 것일 것이 분명했다. 제 몸 위로 굴러 떨어진 상자를 손에 쥐고 게슴츠레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것을 살피는 도운의 등 뒤는 조용하기만 했다.
“왐마야. 벌써 반지가?”
차마 풀어 볼 용기가 없어 그저 상자만 살피는 도운과 대답도 없는 등 뒤의 성진을 대신한 목소리는 희영의 것이었다. 그녀는 선물을 받은 도운보다 더욱 상기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그러나 도운은 그녀의 말에 꼭 폭탄이 든 상자를 든 기분이 되었다. 열자마자 뻥, 소리를 내며 온 교실을 날려버릴 것 같은 위험한 폭탄. 아니면 독약. 그것도 아니면...
“풀어 봐.”
도운의 머릿속이 온갖 위험물로 가득 찰 때 즈음에야 간결한 성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풀어 봐? 풀어보라고?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상자를? 번쩍, 고개를 치켜든 도운이 성진을 향해 돌아앉자 결국 참지 못 한 희영이 도운의 손에서 상자를 빼앗아 들고 풀어내었다.
“어? 시계네?”
상자 속에 든 것은 도운이 상상하던 것이 아닌, 어쩌면 더 유해한 것이었다. 시계바늘 아래의 둥그런 판이 온통 반짝이는. 가죽으로 된 줄마저 ‘안녕하세요. 비싼 몸입니다.’ 태를 내는. 그녀의 손에 들린 시계의 모습에 도운은 허, 바람 같은 숨을 터트렸다.
“해 봐. 어울릴 것 같은데.”
“내가 이걸 와 하노?”
“니 거니까.”
“말이 되나?”
“와 안 되는데. 내가 방금 네게 선물 했으니 네 거지.”
기가 차 절로 날이 선 도운의 말에도 성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며 대꾸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멀끔한 얼굴에 도운은 지금 당장이라도 저 시계를 그의 얼굴로 집어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 겨우 숨을 고르고 희영의 손에 들렸던 시계를 빼앗아 다시 상자에 넣었다.
“마음에 안 드나?”
마음 같아서는 리본까지 똑같이 돌려놓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도운은 리본을 묶을 정도의 손재주는 없었다. 그저 다시 시계를 담은 상자 위에 리본을 올려 성진의 책상 위로 올려 두는 도운을 향해 성진은 태연히 물어왔다. 마음에 안 들냐고? 이게 들고 말고의 문제인가? 어딘가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기색의 성진의 얼굴에 결국 도운은 한 숨을 참지 못하고 내 쉬고 말았다.
“니 잠깐 내랑 얘기 좀 하자.”
지익, 바닥을 끌며 밀려난 의자를 두고 도운이 먼저 교실을 나섰다. 그 뒤로 성진 역시 몸을 따라 일으켰다.
*
도운은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넓은 교정의 담벼락이 위치한 곳까지 걸었다. 도운의 등 뒤로 들려오는 성진의 걸음 소리는 일정 간격 이상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느긋하기만 했다.
“이런 거 이제 하지 마라.”
교정 끝자락에 다다른 도운이 불쑥 몸을 돌려 세우고 내민 말에 성진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뭘?”
정말 모르겠다는 그 얼굴에 다시 한 번 도운의 가슴팍이 들썩였지만, 도운은 다시 한 번 성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아침에 데리러 오는 거, 점심 때 내 대신 점심 받아다 주는 거, 매일 같이 선물 주는 거, 내 아르바이트 할 때 나 보러 오는 거, 예쁘다 소리 하는 거 다.”
하나, 하나 손가락을 곱으며 말하는 도운의 모습에 단정히 드러난 성진의 이마 위로 옅은 세로 줄이 나타나다 이내 사라졌다. 대신 주머니에 꽂고 있던 두 손을 들어 제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성진이 도운에게 되물었다.
“그럼 해도 되는 건 뭔데?”
아, 진짜 이 뻔뻔한 새끼를 우짜면 좋노?
“그걸 왜 꼭 해야 되는데?”
“좋아하니까.”
“아, 좀!”
조금의 간격도 없이 따라 나오는 성진의 대답에 기어코 도운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인상을 한껏 찌푸린 도운의 타박에 성진 역시 내내 무던하던 표정을 굳혔다.
“니는 와 뭐든 안 좋아하는데?”
“뭐?”
“아침에 데리러 오는 거, 같이 점심을 먹는 거, 보고 싶을 때 보는 거, 좋은 거 선물 하는 거. 저런 거 사람들 다 좋아하는데 니는 싫어해. 니가 이유를 물을 때마다 솔직히 대답을 해 줘도 질색을 해. 도대체 니가 싫어하지 않게 윤도운 니를 좋아하는 방법은 뭔데?”
훤히 드러낸 이마 위로 잔뜩 묻어난 짜증이 성진의 목소리에도 스며났다.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시선은 곧장 도운을 향한 모습이 제법 날이 서 도운은 저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니까, 장난은-”
“니는 장난으로 사람 좋아하나?”
장난은 그만 둬라. 하고 말하려던 도운의 말을 툭 잘라낸 성진의 물음에 도운은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대답을 기다리 듯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성진의 시선이 따가웠다.
“...니가 날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겨우 삼키듯 새어나온 목소리에 한참이나 굳어 있던 성진의 입술 사이로 바람처럼 옅은 웃음이 흘러났다.
“그래도 우짜겠노. 내는 니가 좋은데.”
마주친 시선이, 제 것보다 더욱 검은 그 눈동자가 도무지 장난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어 도운은 어딘가 조금 울고 싶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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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았당 'ㅅ'
오후에 마저 올리게씁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