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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FICTION 05 [完]

  • 김구파
  • 03-10
  • 605 회
  • 3 건







 

 

‘네가 싫다는 거 아무것도 안하면 니도 내 쫌 좋아해 주나?’

성진은 그 말을 남기고 먼저 돌아섰다. 저를 따라왔을 때처럼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느릿한 걸음으로 점점 제게서 멀어지는 성진의 등을 보면서도 도운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째. 성진은 정말로 제가 말 했던 그 일련의 모든 것들을 하지 않았다. 성진은 도운이 불편해 하던 그 어떤 호의들-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을 베푸는 대신 하루에 두어번쯤 사소한 친절을 내밀었다. 잘 잤냐. 점심 맛있게 먹어라. 같은.

“오늘 밤에 비 온다카드라. 우산 들고 가라.”

수업이 마치고 다들 집에 가기 위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성진은 제 가방을 챙겨들며 도운을 향해 말했다. 도운이 돌아보자 잠시 스치듯 도운의 머리를 헝클인 커다란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교실 문을 나서는 성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고. 너거 둘, 와 이렇게 담백해 졌는데?”

희영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도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성진의 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

 

훤히 열린 창문 너머로 투닥이는 소릴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에 카운터에 앉아 있던 도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분명 성진이 챙기라는 말도 해 줬는데 어째서 그게 집에서 나오는 순간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는지. 세차게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도운의 입술 새로 깊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아. 어제 빨래했는데 오늘 또 하게 생겼네.

퇴근은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도무지 그 안에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를 보며 도운은 가게에서 제 집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인도 가로 바짝 붙어서 달리면 그래도 좀 덜 젖지 않을까. 그래도 곧 있으면 여름인데 이 정도 비를 맞는다고 감기에 걸리지는 않겠지. 이번 달은 좀 빠듯해서 병원 갈 돈도 없는데. 정신을 어따 둔기고, 대체 내는.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노?”

“그러게 말ㅇ...아, 깜짝이야.”

마침 스스로를 향해 타박을 주던 머리 위로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똑같이 물어오는 목소리에 푸드덕 어깨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창문가에 난 카운터 너머에 선 목소리의 주인은 검은 우산을 든 성진이었다. 성진은 도운의 모습이 꽤 우스웠던 듯 입가를 꾸욱, 말아 당기며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갑자기 뭐고. 놀랐다아이가.”

“니 보러온 거 아이다.”

“.....”

“진짜다. 그냥 지나가다 보니까 니 너갱이 빼고 있는 게 보여서.”

“...별로 너갱이 뺀 거 아니거든?”

“그러기엔 눈에 초점이 너무 흐렸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곧장 대꾸를 해 오는 성진이 얄미워 도운은 괜스레 입술을 삐죽였다.

“말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것도 좀 괴로운 것 같다.”

뜬금없이 내밀어진 성진의 말에 도운이 눈을 둥글게 뜨자 슬핏 웃음을 그린 성진이 대답을 내어 주었다.

“삐죽이는 것도 예쁘다고 하고 싶은데 못 하니까.”

이보세요, 선생님. 지금 다 말하셨는데요.

도운은 한껏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꾹 누르고는 그저 툭 불거졌던 입술을 말아 넣을 뿐이었다.

“우산은 챙깄나?”

그러나 이내 다시 물어 오는 성진의 말에 도운은 또 한 번 삐죽이고 말았다.

“...깜빡했다.”

“니 진짜 정신 빼고 댕기나? 내가 집에 가면서 말 해 줬잖아.”

안 그래도 좀 전에 그 생각 하고 있었으니까 말 하지 말아줄래? 도운은 꼭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에 짧게 혀를 찬 성진이 제 우산을 접으며 창문 옆으로 난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씌아 줄게.”

“안 그래도 된다.”

“어. 근데 씌아줄게.”

“혼자 갈 수 있다니까?”

“알고는 있는데 씌이줄게.”

난 진짜 네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걸 좀 가지고 말 했으면 좋겠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 한 마음의 소리가 도운의 가슴 속에서만 떠돌았다. 쿵. 쿵. 소리를 내며.

 

*

몇 번이고 그냥 가라고, 혼자 갈 수 있다고, 가까우니 뛰면 금방이라고 도운이 손을 내저었지만 기어코 성진은 도운의 퇴근 시간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성진을 보내려 주문을 해야지 테이블 쓸 수 있다는 소리까지 해 보았지만 성진은 태연하게도 밀크 티를 주문했고, 지금 그 밀크 티는 도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성진과 나란히 우산을 쓰고 귀가 중인 도운의 손에.

“니는 마실 것도 아니면서 뭐 하러 이걸 시키는데? 그래놓고 니 단 거 안 마신다고 내한테 주는 건 또 뭐고?”

“그냥 비오니까 생각나서 시켰는데 시키고 보니 내가 단 걸 싫어하더라고. 그래서 니 준 거 아니고 니한테 버린 거다.”

“놀고 있다, 진짜. 내 진짜 니처럼 고집 쎈 사람 처음 본다.”

“내랑 놀아주게? 내는 니처럼 예쁜 애 처음 봤다니까?”

“....”

“아. 실수. 튀어나가 버렸네.”

전혀 실수가 아니라는 느적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해 봤자 조금도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도운은 별 대꺼리 없이 손에 든 밀크 티를 홀짝일 뿐이었다.

평소 혼자 걸으면 15분도 걸리지 않던 거리인데 비가 와서인지, 둘이여서인지 어째 걸음이 늦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얼른 가자 재촉을 할 마음도 없어 그저 제 손 안에 든 따뜻한 밀크 티를 쥐고 성진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는 도운이었다. 찰박이는 걸음 소리가 박자를 맞춰 울렸다.

“니는 내가 왜 좋아?”

눈앞에 이제 슬 도운이 사는 낡은 공공아파트가 보일 때쯤이었다. 도운이 뜬금없이 성진을 부른 것이. 성진은 어쩐 일인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으음, 빈 소리를 내었다.

“이유가 있는 게 중요하나?”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이었다. 그의 물음에 도운의 시선이 성진을 향했지만 성진은 앞만 본 채 걸음을 옮겼다.

“이유가 있어야 납득이 되니까.”

“납득이 왜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내를 좋아할 이유가 없어서.”

사실은 신뢰의 문제였다. 성진의 좋아한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제가 아는 좋아함의 의미와 성진이 생각하는 좋아함의 의미가 다를까 봐. 이번에도 실컷 휘둘리다 결국 남는 것은 저 혼자가 될까 봐. 그러니 애초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네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이유가 있어야, 그 이유가 납득이 되어야 더 이상 성진의 마음을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굳이 이 일련의 것들을 성진에게 설명시킬 필요는 없다 생각에 도운은 저런 간결한 대답만을 내어 놓았다. 성진은 도운의 아파트 앞에 다다라서야 그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미안한데 내도 잘 모르겠다. 그 이유.”

아파트 문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선 성진이 그제야 몸을 돌려세우고 도운을 바라보며 말 했다.

“그냥 네가 좋아. 그게 전부야.”

“.....”

“그러니까 대답은 언제 해 줄래?”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비처럼 시원하게 웃어 보이는 성진의 모습을 보며 도운은 제 손에 쥔 밀크 티 컵을 꼭, 감싸 쥐었다.

 

 

 *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꼭 그 말처럼 도운은 성진에게 점점 익숙 해 지고 있었다. 성진은 여전히 거창한 호의 대신 사소한 친절을 내주었지만, 그 날 이후 친절 속에 한 번은 꼭 제 마음을 담아내었다. 성진은 예쁘다는 소리나 좋아한다는 말을 특별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태연히 받아들이는 거라고. 더 이상 전처럼 질색하며 대꾸하지 않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이제 박성진이 좀 익숙해졌나 보지?”

“강희영이. 그거 내일 내 아침 메뉴인데.”

“설마 고작 이 누룽지가 나한테 주기 아깝다고 하는 건 아니지?”

머그컵에 잘게 부순 누룽지 위로 뜨거운 물을 부어 스푼으로 저어내는 희영의 말에 도운은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라 집에서 쉬려던 도운을 따라 온 희영이 마치 제 집인 냥 도운의 냉장고를 열고 제 간식으로 삼을만 한 -도운에게는 아침 메뉴의 일부였던- 구운 누룽지를 꺼내어 들고 성진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저 이야기도 그녀의 간식 중 일부인 건 아닐까. 잠시 의심이 들었지만 금세 고개를 내저었다.

“별 뜻 없는 소리 같아서.”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성진의 모든 것이 그저 다 장난일 거라는 생각은 많이 누그러졌다. 그러기에 제게 내어주는 그의 모든 말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으니.

“그래서 대답은 언제 할건데?”

“무슨 대답?”

“금마가 고백 했다며.”

“...별 뜻 없을 거라니까?”

커다란 머그컵에 우유를 따르던 도운은 순간 그녀의 말에 펄쩍 뛸 뻔 했지만 다급히 숨을 고르고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내어 놓았다.

“니는 좋아한단 소리를 별 뜻 없이 하나?”

아. 나 이거 지난번에도 있었던 상황 같은데. 잠시 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날이 선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성진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시원한 우유와 함께 삼켜낸 도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윤도운. 이거 참견 맞는데.”

머그컵에 입술을 대고 꿀꺽이며 우유를 마시는 도운을 부른 희영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 진짜로 누굴 좋아하는 건 그냥 좋은 거다. 그게 전부라고.”

꼭 그녀가 먹던 고소한 누룽지처럼 보드라운 희영의 웃음을 보며 도운은 잠시 비 오던 날, 그 비만큼 시원했던 성진의 웃음을 떠올렸다.

 

*

 

그 날 밤. 도운은 성진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우산을 들고 말갛게 웃으며 저를 기다리는 성진의 꿈을. 그리고 그 다음 날 잠에서 깬 윤도운의 첫 마디는 ‘망했다.’-였다.

*

 

아침부터 유난히 일진이 나빴다. 아침부터 학생회 선생님을 돕기로 했다는 희영과 따로 등교를 하게 되어 버스를 탄 도운은 예상치 못하게 차가 막히는 통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는 비가 내렸고, 신발 끈이 풀린 줄도 모르고 달리다 멀쩡한 길바닥에서 넘어져 교복이 더러워 졌고, 넘어진 무릎이 시큰거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1분 차이로 지각 벌점을 받고 말았다. 도운은 1교시 수업이 시작도 하기 전부터 피곤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다쳤나?”

교실을 들어서며 절뚝이는 도운을 한참이나 살피던 성진의 물음에도 적당히 손을 내젓고는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아직도 가쁜 숨에 현기증마저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핑글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려 고개를 젖히자 이내 이마 위로 더운 손이 닿았다. 도운의 것보다 한 뼘은 큰 것 같은 손은 그 온도가 비오는 날의 날씨와는 상이하게 더운 열을 품고 있었다.

“..더운데.”

“어. 니 이마 찹다.”

손을 거두어 달라는 의미를 담은 말이었지만 성진은 그저 제 할 말만 내어 줄 뿐이었다. 생각보다 매끈하고 보드라운 손이라는 생각을 하며 도운은 천천히 본래의 호흡을 찾아 갔다.

“도운아. 다칬냐고.”

그리고 그 때 쯤, 성진은 조금 전의 물음을 다시 한 번 물어 왔다.

“응. 넘어졌다.”

“어디. 무릎?”

“별 거 아이다.”

두 번이나 대답을 무시하긴 껄끄러워 순순히 대답을 내어주었다. 당장이라도 그 상처를 보자고 할 기세로 물어 오는 성진을 향해 적당히 말을 돌려내는데, 마침 교실로 돌아 온 희영이 인사를 건네었다.

“하이, 윤도운. 좋은 아...와따야. 운아! 다칬나? 어디서? 왜?”

하필 넘어져 더럽혀진 무릎이 그녀가 앉는 방향이라 의자를 꺼내던 그녀의 눈에 딱 걸려들고 말았다. 그녀는 조금 전의 성진보다도 더욱 호들갑을 떨며 도운의 상처를 살피려 허리를 숙였다. 도운은 이마에 닿았던 손을 거둬내고 그녀를 막아 세웠다.

“진짜 별 거 아이다. 비와서 괜히 옷만 더러워 진 거라니까.”

그 말에 희영도, 성진도 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영 찜찜하다는 얼굴로 도운의 무릎에서 도무지 시선을 돌릴 줄 몰랐다. 그러나 도운은 더 이상 어떤 말을 하는 것도 귀찮을 만큼 피곤해 져 둘의 걱정을 모르는 척하고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였다. 오늘은 어쩐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

 

그리고 그 나쁜 기분은 점심시간에 바닥을 찍었다. 오전 시간이 지나도록 넘어진 무릎이 영 시큰거렸다. 이대로 점심도 거르고 잠시 보건실에라도 누워 있고 싶었지만 내내 온 신경을 도운의 무릎으로 둔 두 사람 –강희영과 박성진- 때문에 도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식당을 향했다.

교정 뒷편의 그 날 이후 성진은 저의 다른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 가기 전 한 마디 인사를 건네던 것이 전부였는데 오늘은 그 뒤로도 계속 도운의 등 뒤로 시선이 닿았다. 도운은 그런 그의 시선에 더욱 다리에 힘을 주어 걸었다. 희영이 부축이라도 해 줄까 물어왔지만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고는 제 발로 내려 간 것이다. 그 탓인지, 아니면 진짜 세게 넘어지기라도 한 건지 식판을 받아 들고 식탁 위에 앉았음에도 영 무릎이 시큰거려 도운은 식탁 아래로 무릎을 주무르며 희영의 재잘거림-아침 학생회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 혹은 저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키는 선생님에 대한 뒷담화-를 듣고 있을 때였다.

“야. 윤도운 니 시 장학생이라며?”

마주 앉은 희영과 도운의 옆에서 떨어진 갑작스러운 목소리는 낯이 설었다. 도운는 겨우 계란 말이를 깨작이던 젓가락을 쥔 채 고개만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 보았다. 확실히 처음 보는 얼굴이 분명했다.

“....유민재.”

그의 이름은 맞은편에 앉은 희영의 입술에서 나왔다. 얼굴이고 목소리고, 이름까지 낯 선 걸 보니 같은 반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나를 알지? 의아함을 품은 도운의 눈이 느리게 껌뻑였다.

“시 장학생 그거, 말만 장학생이지 사실은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메?”

“...근데?”

“부모님은 두 분 다 가출 중, 니는 자퇴생이었는데 이 시의원의 따님께서 힘을 쓰셨다고?”

“그만해라, 유민재.”

한 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잔뜩 빈정거리는 그를 향해 희영이 낮게 경고를 내밀었다. 꽤나 악성으로 보이는 곱슬머리와 콧등을 지나는 주근깨 등으로 꽤 어려 보이는 인상의 유민재-이라는 남자애-는 희영의 말에 되려 발끈한 얼굴로 그녀를 흘끗 훑어보고는 다시 도운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니처럼 가진 것도 없고, 부모도 없는 새끼가 어떻게 이런 시의원 따님 덕을 다 보고 사는기고?”

평소라면 적당히 나쁘지 않게 자리를 정리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을 도운이었지만 그러기엔 오늘 도운의 기분은 너무도 나쁘기 그지 없었다.

“편입 시험도 다 봤고, 문제없어서 이 학교에 다니는데, 와? 강희영이랑은 어릴 때부터 동네 친구고. 뭐 다른 게 더 필요하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더욱 또렷이 유민재를 올려보는 도운의 눈길에도, 그 목소리에도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어느 새 주변의 아이들은 소란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희영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를 쏘아보았다. 젓가락을 쥔 손을 힘주어 꽈악, 틀어쥐느라 파르르 떨려오기까지 하는 희영의 작은 주먹을 보고 있자니 도운은 피곤함에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순간의 오기에 그의 말을 받아쳤지만 지금이라도 무시하고 자리를 벗어나자 마음먹은 도운이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그래. 동네 친구, 좋지. 난 또 그 얼굴이라도 팔아서 강희영이 구워삶은 줄 알았지 뭐고. 내가 오해했다, 사과할게.”

도운의 앞으로 능청스럽게 과장된 웃음과 악수라도 청하 듯 한 손을 내민 유민재가 다시 한 번 말을 붙였다.

“그럼 이 오해도 좀 풀어 줄 수 있겠나? 시의원 따님의 동네 친구인 니가 어떻게 재력가 아들내미인 박성진이랑 엮였노? 내는 잘 몰라서 니가 빈약한 몸뚱아리 하나 굴려 홀린 줄 알았지 뭐고. 니 가진 건 그거 하나 뿐이잖, 윽!!”

“도운아!!!!”

유민재는 마지막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그대로 일어나 그의 쓸데없는 소릴 재잘거리는 입가로 주먹을 내다 꽂은 도운 때문에. 등 뒤로 희영과 아이들이 말리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도운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를 향해 몇 번이고 주먹을 내밀었다.

“하, 이 미친 새끼가...”

“미친 새끼는 니겠지.”

저를 깔고 앉아 주먹을 내지르던 도운에게 유민재 역시 발을 걷어 차 올리면서 식당의 소란은 결국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

 

그리고 그 날 도운은 오후 수업을 듣지 못했다. 그대로 학생부실에 불려가 반성문 50장과 이틀간의 정학을 선고 받았다. 희영은 저 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 온 거라고, 정학은 너무 과하다며 항의 했지만 학생부 선생님은 정당한 결정이었으니 돌아가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너무하다, 진짜. 분명 유민재가 먼저...!”

“희영아, 그만. 어쨌든 주먹질은 내가 먼저 했다아이가.”

“아, 윤도운!!”

“몸도 안 좋았고..이틀 정도 쉬지, 뭐.”

하교 시간이 지나고서야 돌아 온 교실에서 도운의 가방을 끌어안고 그를 기다리던 희영은 분한 마음으로 결국 눈가를 붉게 적시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도운은 얼른 집에 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때문이다..”

“뭐라노. 이게 와 니 때문이고.”

“..전번에 금마가 추근덕거리길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줬거든. 분명 거기에 대한 복수인데 내 대신 니한테 화풀이를 한 거라고.”

“...뭐. 그럼 또 어떻노. 이미 지난 일인데.”

손은 고개를 숙인 희영의 등을 쓰다듬으면서도 시선은 붉게 물이 든 창문 너머를 향한 도운의 입술에서 잔뜩 지친 기색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도운은 오늘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꼭 몇 해 전, 그 크리스마스 날처럼.

 

*

 

그 뒤로 집에 돌아 온 도운은 꼬박 하루가 넘도록 잠으로 보냈다. 분명 해가 지기 전에 돌아 와 곧장 침대에 몸을 뉘었는데 눈을 뜨니 온통 깜깜한 밤이라 도운은 제가 고작 몇 시간 눈을 붙인 줄 알았다. 가방 속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가득 채운 희영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보기 전까지는. 온통 도운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메시지에 도운은 바로 답장 버튼을 누르려다 다시 화면을 껐다. 벌써 시간은 세벽 세 시였고 연락을 하기엔 너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연락을 하자. 그렇게 생각을 하며 도운은 구겨진 교복을 벗고 욕실로 들어섰다.

오랜 시간 잠을 잔 탓인지 조금 차분해 진 머리 위로 후끈한 김이 풍겨나는 물줄기가 쏟아졌다. 아. 보일러 끈다는 걸 깜빡했네. 이러면 나중에 관리비 많이 나오는데. 걱정을 이어가면서도 도운은 움직일 생각을 않고 멀거니 물을 맞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성진의 생각이 났다.

성진에게서는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 이건 당연하지만 이틀 전 점심시간 이후로 성진을 볼 수 없었다. 성진도 그 애의 말을 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그 애 뿐일까. 그게 정말 희영을 상처주기 위해 그저 해 본 말 뿐이었을까. 알고 보면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성진도,

“..아.”

순간 물줄기가 닿은 무릎이 아팠다. 분명 유민재에게 맞은 얼굴의 상처도 아파야 하는데 도운은 성진의 시선이 닿았던 그 무릎의 상처가 너무 아파 몸을 웅크리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조금 울었다. 나의 가난을, 나의 부모의 부재를 조롱하는 그 모든 말보다도 성진과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화가 났다. 그의 말대로 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이 보잘 것 없는 몸뚱이는 내어 줄 것도 되지 못해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내어줄 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성진에게서 받은 애정이 차마 다시 그에게 가지 못해 도운의 안에서 외로움으로 곪으려 했다.

 

 

*

 

다시 잠에 들기보다는 잠시 바깥바람이라도 쐬려 젖은 머리 위로 후드를 둘러쓰고 아파트 현관을 나섰을 때였다.

“이 시간에 어디 가노?”

문 앞에 선 것은 성진이었다. 분명 시간은 새벽 네 시를 향해 가는 시간이었음에도 성진은 여전히 교복 차림으로 자신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니 와 여기 있, 얼굴이 와 그라노?”

주홍색 가로등 불에 비춰진 성진의 얼굴에는 도운의 것만큼이나 울긋불긋한 흉이 잔뜩 그러져 있었다. 성진은 대답 대신 한 걸음 더 가까이 도운에게 다가서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내었다.

“무릎은 좀 어떤데?”

성진의 시선이 청바지 아래 숨겨진 도운의 무릎을 향했다. 보이지도 않을 것을 알면서도 꼭 그것을 살피듯 찬찬히 눈여겨보는 시선에 도운은 또 다시 상처가 시큰 거리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있었는데?”

“얼굴은? 약은 발랐나?”

“빨랑 집에 가라. 니가 와 여기에,”

“보고 싶어서.”

대답은 없는 질문들만 주고받다 겨우 제대로 된 질문과 답이 맞물린 것이 하필 그것이었다. 도운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성진이었다.

“보고 싶은데, 연락하면 니가 싫어할까 봐. 내 때문에 괜히 그런 쓰레기같은 소리나 듣게 해서 미안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데?”

도운은 조금 전의 질문을 다시 한 번 꺼내었다. 성진은 그 답지 않게 입술을 달싹이며 몇 번인가 말을 고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내었다.

“이틀 전부터. 그냥 여기서 기다리다가 니 나오면은 우연인 척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좀...무섭기도 해서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연락도, 벨을 누르지도 몬했다.”

“무서워?”

“니가 내 싫어할까 봐.”

“.....”

“고작 그런 새끼의 헛소리 뭐가 중요하나 싶지만, 니는 아니니까.”

“.....”

“내는 니를 좋아하지만 니는 아니니까.”

니는 아니니까, 라고 말을 하는 성진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린 것도 같았다. 도운은 목구멍 가득 마음이 체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수 만가지의 마음이.

“근데 있다아이가, 도운아.”

“..응.”

“내 좋아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를.. 싫어하지 않으면 안 될까?”

“.....”

“처음 편의점에서 니 봤을 때부터 나는 네가 좋았어.”

고개를 들어 올린 성진의 눈 위로 주홍색 불빛이 출렁였다. 이마를 잔뜩 구기면서도 웃음을 그리는 그 얼굴이 웃음도, 울음도 아니어서 도운은 그의 눈가에 가득 찬 눈물의 표면장력이 조금만 더 강하기를 빌었다.

“...예뻐서?”

문에 기대어 선 채 후드 아래로 눈을 가려낸 도운이 늘 성진이 자신에게 하던 말을 꺼내자 성진의 입술이 작지만 가로 벌어졌다.

“응.”

“얼굴이?”

“아니.”

“그럼?”

“그냥 다. 그냥. 나는 니가 전부 다 예뻐.”

도운이 바라던 것은 성진의 것이 아니라 제 눈에 차오른 것이 조금 더 강하길, 이기도 했다.

“내가 니한테 내어 줄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내가 줄게. 니는 받기만 하면 안 되겠나.”

대뜸 달려 나온 대답에 후드 아래로 드러난 도운의 입술이 선명한 미소를 그렸다.

“또 선물이며, 네가 주는 호의며 그런 것들을?”

어쩌면 조금 비꼬아 말하는 것 같은 그것을 성진은 올곧게 받아들였다.

“내 마음들을.”

“...마음?”

“응. 니를 좋아하는 마음. 니는 받기만 하다가 나중에 일시불로 페이백 해 주면 돼. 할부도 봐 줄게.”

장난 같은 그 말들을 너무나도 진지한 목소리로 내어주는 성진의 목소리에 결국 도운이 제 안에 가득 얹혀 있던 마음을 삼켜내고 말았다. 도운이 후드를 벗어내며 성진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성진은 그 자리에 선 채 그저 도운을 기다렸다. 꼭 그 꿈 속에서 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니가 내를 그냥 좋아해 줄 때까지.”

“그냥?”

“응. 그냥. 그냥 다. 전부 다.”

도운이 한 걸음씩 가까워짐에도 성진은 흔들림 없이 그를 기다려 주었다. 느긋하면서도 단호한 그의 대답을 들으며 한 발자국씩 다가선 도운의 운동화 앞 코가 성진의 신발 끝에 닿았다. 도운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멈추었다가 눈앞에 보이는 성진의 손을 잡았다.

“그냥 다. 전부 다.”

이제야 온전히 제 안에 삼켜낼 수 있게 된 마음들이 천천히 도운의 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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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루 한 편 올려서 월, 화, 수, 목, 금 할랬는데

혼자 신나서 폭주 해 버림 


진짜 여기가 끝이 맞구요 (코 슥



부디 재밌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1. profile
    • 달달 26-03-11
    달다 달아 이 고등학생들의 사랑이 왜케 풋풋하고 달고 설레죠 ㅋㅋㅋ아 뒤에 이 친구들 연애하는 것도 보고 싶다하면 욕심이려나요! 너무 잘 봤어요
    1. profile
      • 김구파 26-03-11
      뒷 이야기... 히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도전해 볼게요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profile
    • 26-03-26
    현생 여유가 없어서 이제서야 읽으러왔는데 1편부터 한자리에서 다읽었어요!! 근데 제가 봤을때는 여기가 절대 끝이 아닌데 말이죠,,? 왜 완인걸까요!?!?!? 얼른 뒷이야기를 더 주세요 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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